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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 의료나 지역 의료 체계의 붕괴만이 국내 의료의 고질병은 아니다. 의대 졸업생의 99%가량이 임상 현장으로 투입된다는 문제도 있다. 얼핏 들으면 당연한 것 아닌가 싶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의사과학자 부족으로 이어진다.
의사과학자는 의학박사 학위(MD)와 이·공계 박사학위(Ph.D)를 함께 보유한 연구자를 의미한다. 바이오산업이나 혁신 의료의 발전을 이끄는 핵심 주체로, 임상과 연구 경험을 두루 갖췄다는 특징이 있다. 글로벌 제약사 열 바로드림론 에 일곱은 의사과학자를 최고기술책임자(CTO)로 임명했을 정도다. 이 부문에서 한국은 만성적인 인력 부족 문제를 겪고 있다.
의사과학자, 1만 명 더 필요한데 누가 할까
한국바이오협회는 국내 혁신의료·바이오산업에서 필요한 전체 의사과학자 수를 1만4000여 명 수준으로 추산하고 있다. 현재 국내 의사과학자는 4300명 내 학자금대출생활비 외다. 매년 배출되는 의사과학자 수를 현재의 10배로 늘린다고 해도 전체 수요를 감당하려면 4~5년이 걸린다.
미국 메릴랜드에서 만난 박지훈 한미생명과학인협회장은 "한국의 병원은 규모에 상관없이 수익을 위해 최대한 많은 수의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 구조"라며 "이 같은 의료체계에서 연구에 매진하는 의사과학자를 배출하는 것은 극도로 어려울 수 부동산담보추가대출 밖에 없는 문제다"라고 말했다. 대학병원 교수들조차 병원 유지를 위해 하루에 100~200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환경에서 연구에 할애할 시간이 부족한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메릴랜드 지역은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식품의약국(FDA)의 본사가 있고, 존스홉킨스대·메릴랜드대·버지니아대·조지타운대 등 기초 연구나 중개·임상 연구에 특화된 남양주별내지구신일유토빌 대학들의 연구소가 밀집해 있다. 차로 이동하는 거리 곳곳에 유명 의대 연구소의 이름이나 FDA 현판을 마주할 수 있다.

박 회장이 대표로 있는 한미생명과학인협회(KAPAL)는 미국 내 워싱턴 DC, 메릴랜드, 버지니아, 캘리포니아 등의 바이오산업과 생명과학계의 협력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비영리단체다. 현재 2000명이 감사카드 넘는 정회원이 소속되어 있다.




박지훈 한미생명과학인협회장은 "의사과학자를 길러내는 것은 보험체계, 수가제도, 연구 인프라 등 다양한 요소가 얽힌 복잡한 문제"라고 말했다. 사진=장자원 기자


문제는 '돈'…"다양한 수익옵션 확보돼야"
연구에 '올인'하더라도 일정한 수익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제도도 필요하다. 미국에서 의사과학자들이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데는 미국 최대의 임상시험센터이자 의료연구기관인 NIH의 존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NIH는 보건과 의료 전반에 걸친 기초 응용 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27개의 산하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와 다르게 한국의 대학병원은 의료 전달 체계의 최상위에서 '상급종합병원'으로서의 기능과 대학교수들이 모여있는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하고 있다. 미국의 의료 연구 환경과는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다.
NIH에서 4년 반 동안 박사후연구원(포스트닥터) 과정을 거친 박 회장에 따르면, NIH의 연구 인력은 10년 전인 2015년 기준으로도 이미 6000명을 넘겼다. NIH 연구직 의사의 연봉은 박 회장의 재직 당시 평균 18만 달러(약 2억5200만 원)였다.



200개 입원 병상과 1600여 개의 실험실을 갖춘 미국 국립보건원(NIH) 임상 연구 센터 전경. 사진=NIH


"물론 이 정도의 봉급은 미국 임상의들에 비하면 높은 편은 아니예요. 미국 개원가에서는 임상의가 하루에 6시간, 한 달에 20일 정도만 근무해도 두 배가 넘는 연봉을 쉽게 벌 수 있거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NIH 연구 과제를 선정할 때 내부의 연구원들이 훨씬 유리하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임상의를 포기하고 연구원으로 남는 걸 선택하기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을 정도의 보상 수준입니다."
연구 인프라 격차, 어디부터 손대야 하나
NIH는 연구 인력 확보를 위한 인턴십도 촘촘하게 설정되어 있다. 전국의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여름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연구 기회를 제공하며, 인턴십 기간도 2개월에서 12개월까지 다양하다. 연구 기간에 참여한 논문에는 이들 인턴 역시 NIH 소속 연구원으로 기재된다.
김 회장은 "NIH의 인턴 경력을 바탕으로 의대에 들어가 의학박사(MD) 학위를 취득한 뒤, NIH에 돌아와 연구원으로 진로를 이어가는 사례도 많다"며 "의사이자 연구자로 활동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수익적으로나 제도적으로 갖춰져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보스턴의 하버드 혁신연구동에서 만난 허준렬 하버드대 교수 역시 국내의 연구 인프라를 위해선 수익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허 교수는 "미국의 대학과 연구소는 연구 역량이 뛰어난 인력에게 인센티브로 보상하는 제도가 아주 잘 갖춰져 있다. 반대로 연구를 못하면 교수 자리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도 빈번하게 생긴다"며 "미국은 연구 실적 역시 굉장히 '자본주의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국내 대학병원에서는 연구 실적이 곧 병원이나 교수의 수익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임상 환경에서 얻는 수익에 비해 연구 사업을 수주하는 것이나 스타트업 창업이 매력적인 옵션이 아니다.
한국의 일부 연구 사업 과제나 프로젝트에서 단기간에 정량적으로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생명과학 분야는 대부분 최소한 5년 정도는 기다려야 바라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상황이 많다. 또 일반적으로 위상이 낮은 저널에 10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최상위권의 저널에 한 편 게재하는 것보다 쉽다. 단기간에 정량적으로 평가를 하다보면 연구 퀄리티가 내려갈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국형 모델을 만들어내야 할 때"
박 회장은 미국과 한국의 상황이 다른 만큼 우리만의 '한국형 모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유의 여신상이 아무리 멋있다고 한들 그대로 여의도에 갖다 놓으면 그건 아무런 사회적 맥락도, 가치도 없는 청동색 여자 동상에 지나지 않거든요. 미국의 모델을 적극 참고하고 공부하는 것은 좋지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겁니다. 결국 의미 있는 것은 한국형 모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허 교수는 "한국의 임상이나 수술 역량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어서 많은 중증 환자들과 수술 환자들이 대학병원들로 몰리고 있기에 엄청난 수의 임상 샘플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며 "한국이 강점을 가진 부분과 미국 등 다른 나라의 강점을 적절히 융합한다면 훌륭한 한국형 모델이 나올 수 있을 거라 본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이 의료 난제를 극복하기 위한 연구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게 한국형 모델의 사례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국형 ARPA-H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은 이 사업은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 '보건고등연구프로젝트국(ARPA-H)'을 벤치마킹했다. 실패 위험이 높지만 성공하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연구과제에 대해 총 예산 1조 원 이상을 투입하겠다는 구상이다.
(시리즈 3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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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원 기자 (jang@kormedi.com)